예수님을 영접한 자,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는 영원한 속죄를 받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.
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서 난 자들이니라 (요한복음 1:12-13)
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(요한복음 3:16)
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 (요한복음 5:24)
예수님이 다 이루어 놓으신 사실을 믿는 것이 영생입니다. 우리의 모든 의심이 하나님 앞에 맡겨지는 것입니다. 2천 년 전에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히실 때 모든 인간의 죄는 그 십자가에서 없어졌습니다.
그 후부터 하나님께서는 출애굽 할 때 유대인을 직접 대하셨던 것처럼 인간을 직접 보지 않으시고 그리스도의 피를 통해서 보십니다. 그리스도의 피를 통해서 우리를 보실 때 우리의 모든 죄는 용서되어 있습니다. 피로 세운 언약인 것입니다. 그 거룩한 피가 우리의 죄를 속해 줍니다.
죄 속한 은혜의 찬송을 기쁘게 부름은
어린양 예수의 그 피로 속죄함 얻었네
찬송가 189장 (마음에 가득한 의심을 깨치고)
그러므로 이 세상에 사는 동안 자기의 죄를 하나님께 자백하고, 세상을 향해 자기의 믿는 바를 고백할 권한이 하나님의 자녀에게 있는 것입니다. 간혹 우리의 믿는 바를 비난하는 소리를 들을 때마다 “당신들이 모르니 그렇지, 만약 이 사실을 알고 나면 당신도 나와 똑같은 소리를 하게 될 것입니다.” 하는 생각이 듭니다. 하나님을 섬기는 일에 열심을 낸다는 것이 오히려 하나님의 이름을 모독하는 것이 될 수도 있습니다.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은 한 번 피를 흘리심으로써 모든 인간의 죄를 영원히 사해 놓으셨습니다. 영원히 우리를 위해 흘려 놓으신 피입니다. 그러니 더 이상은 피를 흘릴 수도 없으며 또 흘릴 필요도 없습니다.
이 십자가의 영원한 속죄의 사실을 부인하고 다른 복음을 전할 때 기독교의 본질은 변하는 것입니다. 잘못하면 하나님을 믿되 영원한 사랑의 하나님이 아니라 유한하고 인색한 사랑의 하나님으로 믿습니다. 그래서 “영원히 변치 않는 사랑 성도여 찬양하세” (찬송가 404장) 하고 찬송가를 부르면서도 그 찬송가 가사와는 먼 거리에 있을 수도 있습니다. ‘영원히 변치 않는 사랑’이라고 찬양대에서 방금 불렀는데도 어떤 설교자는 “믿는다고 안심하지 마십시오. 힘쓰고 애써야 합니다.” 하고 모순된 주장을 하기도 합니다.
예수님을 영접한 자,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는 영원한 속죄를 받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.
예수님이 다 이루어 놓으신 사실을 믿는 것이 영생입니다. 우리의 모든 의심이 하나님 앞에 맡겨지는 것입니다. 2천 년 전에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히실 때 모든 인간의 죄는 그 십자가에서 없어졌습니다.
그 후부터 하나님께서는 출애굽 할 때 유대인을 직접 대하셨던 것처럼 인간을 직접 보지 않으시고 그리스도의 피를 통해서 보십니다. 그리스도의 피를 통해서 우리를 보실 때 우리의 모든 죄는 용서되어 있습니다. 피로 세운 언약인 것입니다. 그 거룩한 피가 우리의 죄를 속해 줍니다.
그러므로 이 세상에 사는 동안 자기의 죄를 하나님께 자백하고, 세상을 향해 자기의 믿는 바를 고백할 권한이 하나님의 자녀에게 있는 것입니다. 간혹 우리의 믿는 바를 비난하는 소리를 들을 때마다 “당신들이 모르니 그렇지, 만약 이 사실을 알고 나면 당신도 나와 똑같은 소리를 하게 될 것입니다.” 하는 생각이 듭니다. 하나님을 섬기는 일에 열심을 낸다는 것이 오히려 하나님의 이름을 모독하는 것이 될 수도 있습니다.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은 한 번 피를 흘리심으로써 모든 인간의 죄를 영원히 사해 놓으셨습니다. 영원히 우리를 위해 흘려 놓으신 피입니다. 그러니 더 이상은 피를 흘릴 수도 없으며 또 흘릴 필요도 없습니다.
이 십자가의 영원한 속죄의 사실을 부인하고 다른 복음을 전할 때 기독교의 본질은 변하는 것입니다. 잘못하면 하나님을 믿되 영원한 사랑의 하나님이 아니라 유한하고 인색한 사랑의 하나님으로 믿습니다. 그래서 “영원히 변치 않는 사랑 성도여 찬양하세” (찬송가 404장) 하고 찬송가를 부르면서도 그 찬송가 가사와는 먼 거리에 있을 수도 있습니다. ‘영원히 변치 않는 사랑’이라고 찬양대에서 방금 불렀는데도 어떤 설교자는 “믿는다고 안심하지 마십시오. 힘쓰고 애써야 합니다.” 하고 모순된 주장을 하기도 합니다.